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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30925] 9월 명사특강, 아버지는 내게 살아있는 꿈을 지폈다

작성자
관리자
작성일
2013.10.14
조회수
5381
"아버지는 내게 살아있는 꿈을 지폈다
"우리시대의 만화가 박재동...아버지 일기장 속에서 삶을 그리다
 
지용진 기자
▲ 아버지의 일관된 긍정의 철학이 오늘의 그를 만들었다고 박 화백은 웅변했다. 시대의 부조리 속에서 시사만화를 그리면서도 풍자와 윗트가 넘치던 그의 만평이 통쾌했던 이유가 여기에 있었다.
수원시 평생학습관에서는 25일 오후 2시 시사만화가 박재동 화백을 초청해 ‘만화로 돌아보는 나의 삶, 그리고 아버지를 말한다’라는 주제로 명사특강을 진행했다. 박화백은 강연을 통해 만화이야기와 함께 “아이의 낙서는 존재의 표현이다. 감사하고 칭찬해라”라는 아버지의 칭찬이 자신의 재능이 되고, 만화가로서 삶을 살게 됐다는 이야기, 이를 통한 아버지와의 애틋했던 기억과 그 자신이 아버지가 된 후 깨달은 자식교육에 대해 들려줬다. 박재동 화백은 현재 한국예술종합학교 영상원 애니메이션과 교수로 재직 중이다. <편집자주>
박재동 화백은 무엇보다 아들을 있는 그대로 바라봐주는 아버지의 담담함이 고마웠다
컴퓨터에 새 폴더를 만들었다. 폴더 이름은 박재동. 설레는 마음으로 사진 하나하나를 담았다. 무엇보다 강연에서 보았던 그의 부드러운 배려의 교훈이 고마웠기 때문이다. 이제 타이핑을 시작한다.
“인생에 있어 자칫 좌절의 시기를 나는 그림으로써 극복했고 아마도 그것은 좌절이 아닌 새로운 내 인생의 도약기며 변곡점이었다. 그 시기를 버텨낼 수 있었던 건 아버지의 따스한 격려였다.”
박재동 화백에게 아버지는 늘 인자한 존재였다. 자식의 재능과 소질을 그대로 인정하고 그 품성을 긍정하고 그 맘을 지키셨다.
박 화백은 무엇보다 아들을 있는 그대로 바라봐주는 아버지의 담담함이 고마웠다. 아버지는 그에게 섣불리 다가 갈 수 없는 존재였지만 언제나 든든한 울타리로 박 화백을 지켜주던 정신의 지주였다.
▲ 어릴 적 바닷가를 처음 보고 그 감동에 못 잊어 송곳을 도구로 장판에 점으로 파도를 묘사했을 때 아버지는 “음, 잘 그렸구먼” 하시며 꾸중보다는 그의 재능을 항상 북돋으셨다.
▲ 박 화백은 늘 따스한 맘으로 자식을 이해할 것을 권유했다. 격려하는 아버지, 어머니의 한 마디가 자라나는 자식의 운명을 바뀌게 한다는 교휸을 잊지 말라고 했다.
아버지의 만화점이 있던 그 문을 처음 열었을 때 새로운 꿈이 펼쳐졌다
교편을 잡으시다 지병으로 어렵게 부산에 만화점을 개설한 아버지의 나래에서 그는 시대의 꿈과 마주했다. 가난했던 시절에 부여잡을 수 있었던 미래에 대한 밝은 비전이 거기 있었다.
실사로 구현되지 않는 2D의 공간 속에서 마음껏 상상의 나래를 폈고 자유로운 사고의 기틀 위에서 새로운 도전과 항해를 멈추지 않았다.
아버지는 인자하셨지만 엄한 원칙주의자셨다. 아버지의 변하지 않는 응원군이 어머니셨다. 넉넉치 않은 형편 속에서도 박 화백의 어머니는 궁색한 내색 한 번 하지 않았던 아버지의 든든한 후원자였다.
“부모님 두 분의 삶을 나는 따라갈 수 있을까 항상 의문을 품는다. 이제 와서 생각하건대 아버지는 인자함 이상의 유모와 윗트가 넘치신 분이었다.”
어릴 적 바닷가를 처음 보고 그 감동에 못 잊어 송곳을 도구로 장판에 점으로 파도를 묘사했을 때 아버지는 “음, 잘 그렸구먼” 하시며 꾸중보다는 그의 재능을 항상 북돋으셨다.
아버지의 일관된 긍정의 철학이 오늘의 그를 만들었다고 박 화백은 웅변했다. 시대의 부조리 속에서 시사만화를 그리면서도 풍자와 윗트가 넘치던 그의 만평이 통쾌했던 이유가 여기에 있었다.
격려하는 아버지, 어머니의 한 마디가 자라나는 자식의 운명을 바뀌게 한다
관통하는 엄숙한 시대정신을 놓치지 않으면서도 가장 만화다운 만화로 새로운 시사만화의 지평을 연 그의 만화는 국내 만화가 최초로 교과서에 수록된다.
아버지의 만화점이 있던 그 문을 처음 열었을 때의 경이로부터 은발의 장년이 된 지금까지 일관되게 그의 그림은 희망의 메시지를 던졌고 그래서 그는 영원히 꿈꾸는 청년이다.
“아버지는 지병 속에서도 당신의 몸을 끝까지 보존해가며 가정을 돌보셨다. 내가 아들에게 그만큼의 사랑을 베푸는 지에 대해 생각해보게 된다.”
박 화백은 늘 따스한 맘으로 자식을 이해할 것을 권유했다. 격려하는 아버지, 어머니의 한 마디가 자라나는 자식의 운명을 바뀌게 한다는 교훈을 잊지 말라고 했다.
▲ 박 화백의 머리카락은 이제 은빛물결로 일렁이다. 그럼에도 아버지는 잊을 수 없고 잊혀지지 않는 존재다. 그러기에 아버지는 더더욱 그의 가슴에 늘 설레임으로 남았다.
▲ 박 화백은 늘 따스한 맘으로 자식을 이해할 것을 권유했다. 격려하는 아버지, 어머니의 한 마디가 자라나는 자식의 운명을 바뀌게 한다는 교휸을 잊지 말라고 했다. 강연 후 캐리커처를 그려주는 박 화백의 모습이 진지하다.
그림을 좋아하고 사람을 좋아하는 더 이상 꾸밀 수 없는 만화가 박재동
박 화백은 아버지의 일기에서 삶의 진중함과 성찰 속 치열한 엄숙과 마주하며 그 토양을 성장시켜온 일기를 꼭 써 보라는 권유도 잊지 않았다.
그는 마음 속 어려움이 있을 때 어머니에게 전화를 걸기 시작했고 10년간 건낸 안부전화가 지금도 이어지고 있다고 밝히며 아버지 생전에 이 일을 했다면 어땠을까 하는 아쉬움의 물음을 던진다.
박 화백의 머리카락은 이제 은빛물결로 일렁인다. 그럼에도 아버지는 잊을 수 없고 잊혀지지 않는 존재다. 그러기에 아버지는 더더욱 그의 가슴에 늘 설레임으로 남았다.
그는 그 설레임을 고스란히 백지에 담았다. 줄지어 서 그림을 청하는 이들의 면면을 부드런 붓터치와 자상한 대화로 강연장을 훈훈하게 만들었다.
그림을 좋아하고 사람을 좋아하는 더 이상 꾸밀 수 없는 만화가 박재동의 모습 그 자체였다.
박재동 화백은?
박재동 화백은 서울대학교 회화과를 졸업, 휘문고와 중경고 등에서 미술교사로 재직했으며, 1988년 한겨레신문사 창간멤버로 참여, 8년동안 ‘한겨레그림판’을 그렸다. 과감한 캐리커처와 말풍선, 호쾌한 풍자로 ‘한국의 시사만화는 박재동 이전과 이후로 나뉜다’라는 평을 듣고 있다. 현재 한국예술종합학교 영상원 애니메이션과 교수로 재직 중이다.
 
[원문보기] 광교신문(http://www.kgnews.net/news/articleView.html?idxno=3951) / 9월 25일 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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