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국 국왕 엘리자베스 2세가 9월 8일 96세를 일기로 생을 마쳤다. 장례식이 치러진 19일, 영국 런던에는 교회 종소리가 96차례 울려 퍼졌다. 여왕의 생애를 상징하는 종소리는 장례 시작 시각인 오전 11시가 되기 96분 전부터 매분 울려 도시를 가득 채웠다. 여왕의 주검을 실은 관이 엿새 동안 머무르던 웨스트민스터 홀의 관대에서 들어 올려졌고, 왕립 해군 수병 142명이 이끄는 총기 마차에 실렸다. 스코틀랜드 전통 악기인 백파이프 연주가 시작됐고, 여왕은 직선거리로 150m 정도 떨어진 웨스트민스터 사원으로 옮겨졌다.
26세에 취임하여 무려 70년 7개월을 재임했던 그녀가 가는 마지막 길을 많은 사람이 아쉬워했다. 세계 각국에서 500여 명의 정상급 조문객이 장례식장을 찾았으며, 100만 명이 넘는 일반인들이 조문했다. 조문객들은 10시간을 넘게 기다리면서 말이다. 저명 축구선수 데이비드 베컴도 13시간을 기다렸다고 한다. 영국인들은 장시간의 대기시간을 견디기 위해 음식도 싸 오고, 의자도 준비하는 사람들이 있었다. 비가 오는데도 줄은 이어졌고, 밤을 새우는 사람들도 있었다.
영국인들이 엘리자베스 2세에 대해 갖는 마음은 각별하다. 어떤 분은 “우리는 인생 중 단 하룻낮과 밤을 들여 여기에 서 있을 뿐이지만, 엘리자베스 2세 여왕은 우리에게 70년을 주었습니다.”라고 이야기했다. 다른 분은 “우리 여왕께 마지막 경의를 표하러 와야 할 것 같았다. 여왕은 우리를 위해 많은 것을 해주셨다”고 말했다.
도대체 70년 동안 여왕은 국민을 위해 무엇을 했을까? 영국 국왕은 국군 통수권을 가지고 있고, 수상 임명권과 의회 해산권 등 막강한 권한을 가지고 있지만, 실제로 이러한 권한을 직접 행사하지 않고 현실 정치에 관여하지 않는다. 총리도 의회에서 선출하면 그냥 임명한다. 정치는 의회와 정당에서 한다. 국왕은 정당 정치에 관여하지 않는다. 다만, 상징적으로 최고의 자리를 지키고 있을 뿐이다. 그러나 이 상징적인 역할이 때로는 실질적인 역할보다 더 크다.
여왕이 매일 오전에 하는 일은 편지를 읽고 답장을 쓰는 일이다. 매일 300통이 넘는 편지가 여왕에게 온다. 세계 각국에서 말이다. 한국에서도 적잖은 편지가 오며, 유럽과 미국 외에 아프리카나 인도에서도 많은 편지가 온다. 공식적인 초청의뢰나 감사의 편지가 대부분이지만 단순한 고민 상담이나 교도소에서 온 것, 정신질환자가 보낸 것들도 상당수다. 비서들은 편지 중에 10통을 추려준다. 10통에 대해서는 정독하고 정성스레 답을 한다.
그리고 일 년에 300건이 넘는 행사에 참석한다. 하루에 한 번꼴이다. 그중에서도 특히 의미를 두는 행사가 일주일에 대체로 금요일에 있는 ‘메달 수여식’이다. 선행을 베푼 사람, 사회에 모범이 되는 사람, 역경을 딛고 일어선 장애인, 성공한 운동선수 등 각계의 다양한 사람들을 버킹엄궁으로 초청하거나 직접 현장에 가서 메달을 준다. 메달을 수여하며 여왕은 질문을 하거나 격려의 말을 건넨다. 또 외국 사절이나 특별한 사람들과의 접견을 빠뜨릴 수 없다. 수상은 매주 한 차례 찾아와서 국정 보고를 한다. 이 자리에서 여왕은 대체로 들기만 한다. 할 말이 있으면 직접적인 언급은 하지 않고 돌려서 애매하게 이야기할 뿐이다.
이 모든 일보다 정말 중요한 일이 있다. 미소를 띠고 대중 앞에 나서는 일이다. 인자한 모습으로 대중매체에 얼굴을 비추는 것도 포함해서 말이다. 국민은 왕의 이런 모습을 보고 환호한다. 그런 왕을 통해 그들은 하나가 된다. 영국인들은 영국인으로서 일체감을 느끼고, 존재감을 느낀다. 그게 왕의 역할이다. 왕은 그렇게 감정적으로 국가에 이바지하는 것이다. 다스리지 않지만, 결국 다스리는 사람이 왕이다.
리더는 실질적인 정책이나 행동을 통해 집단에 기여하기도 하지만, 이렇게 감정적이고 상징적인 역할도 해야 한다. 한 사람의 리더가 이 두 역할을 동시에 해내는 경우도 있다. 그런데 이 역할을 사람들이 나누어 할 수도 있다. 창업자가 나이가 들어 일선에서 물러나면 그가 영국의 국왕처럼 뒤에서 상징적 역할을 해줄 수 있다. 그는 의식적인 자리에 참석하고, 좋은 말만 해주는 것이다. 그리고 조직에 원로가 있으면 그분들이 이 역할을 해줄 수 있다. 존재하는 것만으로 힘이 되는 그런 역할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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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문] [조영호 교수의 Leadership Inside 224]다스리지 않고 다스리는 사람:화성신문 (ihsnews.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