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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뾰족한 마음: 지치지 않고 세상에 말걸기_위근우(대중문화평론가)』

작성자
김정희
작성일
2023.02.10
조회수
663
비평이라는 것은 생산적인 대화를 끌어내는 작업이라고 한다. 창작자도 자신이 말하는 것의 모든 의미를 다 알 수 없다. 당장 우리의 일상적인 대화에서 조차도 나의 의도가 100%로 전달되는 것은 아니다. 당연히 굴절될 수 밖에 없다. 어휘와 구조를 만들어 내기가 쉽지 않다. 비평가는 작가보다 똑똑하지 않다고 하더라도 ‘성실한 독자’로서 보지 못한 점을 볼 수있다. 예를 들어 저자는 <오징어 게임>을 여러번 보고, 그 작품에 대해 얘기를 할 수 있었다. 물론 비평에서 글을 쓸 때는 나의 해석을 완결지어서 써야 한다. 당연히 정답은 아니다. 정답을 추구하는 ‘성실한 해석들’이 서로의 논거를 교환하고 그중에서 가장 설득력이 있다라고 생각하는 해석이 아마 정답에 가까울 것이라 생각한다. 비평가 역시 자신의 생각을 정밀하게 써서, 작품과 관련한 담론안에 내 관점을 쓰는 과정에서 정답에 가까워지도록 유의미하게 다가갈 수 있다.
외부인 시점에서 더 잘 보일 수 있다는 예로 영화 『머니볼』을 인용했다.“우리는 자신이 평생 해 온 경기에 대해 놀랄만큼 무지하다.”< 미국의 전설적 야구 선수 미키 맨틀-영화 머니볼 도입부에 인용 >창작자와 수용자 사이 비평이 필요하다.
요즘 사람들이 좋아하는 것은 큐레이션이지 비평은 아닌 것 같다. 비평을 좋아할 이유가 없다. 그럼에도 비평이 왜 필요한가? 작품의 의미라는 것은 “사회적 맥락에 따라 굴절”이 된다. 비평가들은 그 사회적 맥락에 따라 굴절되는 걸 마주치는 사람들이다. 어떤 사회적 맥락안에서 어떻게 받아들여야 될지 해석하고, 피드백을 할 수 있는 유의미한 작업을 하는 자이다. 수용자들 또한 동시대적 맥락에서부터 자유롭지 못하다. 사람들은 사이다 서사를 좋아하는 편이다. 사람들이 “사이다 서사”를 좋아하게 된 것은 현재의 상황과 맞닿아 있다. 결국에는 설득이 아니라 상대방에 대한 전멸을 원하게 된다. 서로 설득해서 잘해 보자는 것이 아니라 처절하게 파괴해서 쾌감을 맛보려고 한다. 취향이라는 것이 사실은 정치적 맥락과 연결되어 있다.
문화적 텍스트의 창작과 수용은 이처럼 다양한 컨텍스트 안에서 교환되면 그 과정에서 컨텍스트에 영향을 미칠 수 있다. 예를 들어 여성에 대한 잘못된 관념들이 변화될 수 있다. 컨테스트라는 것은 거창하게 얘기하자면 ‘세상을 바뀌는 것’이다. 그동안 당연히 여겼던 것이 더 이상 당연히 여기지 않고, 더 나은 이야기를 할 수 있다. 결국 우리의 삶을 조금이라도 더 나아질 수 있다는 관점이 필요하다. 물론 이는 잘 될고 있을 때 가능하다.비평적 관점이란 우선 콘텐츠의 의미를 나의 관점으로 해석하는 작업이다. 두 번째, 그 나의 관점이라는 것이 타당한지 질문하는 것이다. 다음으로, 나의 관점을 수정하고 보완하는 작업이다. 마지막으로 콘텐츠를 더 잘 알고 나의 관점을 더 정교하게 하는 것이다.저자 위근우는 두루뭉술 하지 않겠다는 태도를 <뾰족한 마음> 에서 말하고 싶었다.
그럼 ‘무엇이 두루뭉술한 것인가’라고 얘기하자면 다음과 같다.첫째, 내 생각인지 남들이 그렇다고 해서 그렇게 생각하는 것인지 ‘두루뭉술’하게 넘어가는 것이다. 둘째, 남들과 다투기 싫어 ‘두루뭉술’하게 넘어가는 것, 옳은 판단인지 스스로 따져보지 않는 것이다. 셋째, 무엇이 옳은지 알지만 타협하는 것이다. 마지막으로, 적당히 옳은 말을 하는 선에서 사유를 더 진행시키지 않는 것이다. 뾰족한 비평이란 무엇일까. 사유를 뭉툭하지 않게 다듬어 내는 것이다. 또, 윤리적 감각을 예민하게 유지 하는 것이다. 무엇이 윤리적이냐고 했을 때, 무엇이 더 나은 것이냐는 감각같은 것이다. 우리 각각의 삶이 어떤 방향으로 나아갈 지 상상해 보는 것이다. 결국, 작거나 주변부로 배제되는 사건에 민감하게 반응하는 것이다. 누군가 스쳐지나가는 장면안에서 뭔가를 발견하는 것이다. 주의를 기울이고 의미를 체크해 나가는 것들이 뾰족함을 생기게 하는 것이 아닐까라고 생각한다. 비평이라는 것이 세상 안에서 존재하고, 사회적 기여를 해야 한다. 비평적 관점이라는 것이 우리가 그냥 넘어가기 쉬었던 것 들에 대해서 다시 한번 생각하게 하고, 세상을 바꾸는 것이라고 본다. 공론장 안에서 의미있는 담론을 만들어내고 세상이 조금씩이라도 나아진다면 적어도 맛있는 빵만큼의 기여를 한다고 생각한다.
글이라고 하는 것이 결국에는 논의를 이끌어 냈을 때, 그걸 통해서 약간의 기여를 할 수 있을 뿐이다. 그걸 하기 위해서 노력을 한다. 뾰족하지 않는 비평이라는 것이 무슨 가치가 있을까. 비평가라는 직업으로서 뾰족한 비평이 최소한의 전제라고 생각한다. 저자의 책 <다른게 아니라 틀린 겁니다-괄호 안의 불의와 싸우는 법>(2019,시대의 창)을 소개해주었다. 이와 함께 위근우의 리플레이에 쓴 <배제됐던 목소리가 돌아왔다 ”우리가 지금 여기 있지라“>(2019.6.15.)칼럼의 글을 추천해 주었다.
https://m.khan.co.kr/culture/culture-general/article/201906150600005#c2b

대중문화평론가 위근우님의 강연을 들었다. 저자의 <뾰족한 마음>을 아직 읽지는 않았다. “탄광의 카나리아”같은 존재가 비평가가 아닐까라는 마음이 생겼다. 강사님의 말처럼 ‘성실한 독자’이자 ‘사회적 맥락을 잘 찾아내는 사람’이라는 말에 공감했다. 서로 소통할 때도 ‘두루뭉술’하게 얘기하는 것은 좋은 삶을 위한 것이 아니라는 걸 깨달았다. 세상에 좋은 담론을 만들어 나가려면 일상에서 조금은 ‘뾰족한 마음’을 의식하면서 생활하기로 다짐(?)해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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