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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침반 기획강연] 사랑의 쓸모 - ‘민낯들 - 잊고 또 잃는 사회의 뒷모습’

작성자
권미숙
작성일
2022.09.18
조회수
910



“내가 그냥 생각하는 대로 편한 대로 세상에 주어진 어떤 관성대로 살아가게 될 때, 그 사회는 어떤 면에서는 좋아지는 것도 있겠지만 문제가 오히려 은폐되는 일이 벌어지는 겁니다.”

9월 7일, 나침반 기획 강연 <사랑의 쓸모> 중 첫 번째로 만난 오찬호 작가의 말이다. ‘민낯들 - 잊고 또 잃는 사회의 뒷모습’이라는 주제로 온라인 현장을 찾은 작가는, ‘사랑’이라는 단어를 언급하며 말을 이어갔다. 사랑이 넘치면 경청을 해야 하는데 사회적 현상의 문제점을 주로 이야기하는 사람이 사랑 이야기를 하면 비판부터 하는 세태를 콕 지적하면서.

마가렛 미드라는 인류학자는 ‘치유된 넓적다리뼈’를 가리켜 문명의 시작이라고 표현한다. 치유된 넓적다리뼈(부러졌다 붙은 흔적이 있는 다리뼈)는 누군가가 그 사람이 치유되는 동안 곁에서 돌봐주었음을 나타내는데, 누군가가 그 부상자를 위해 사냥을 해서 먹을거리를 가져다주었다는 의미가 된다. 이와 같은 이타적인 행동, 연민 등이 발현된 징후를 문명의 시작이라고 보는 것이다.

오찬호 작가는, “내가 약자에게 공감하고 그 약자가 앞으로 좀 더 나은 사회에 살 수 있도록 고민하는 것은 내가 특별해서가 아니라 인간이 가지고 있는 가장 당연한 어떤 특징이라고 이해를 하는 것이 훨씬 더 속 편하다”라고 말하며 글을 쓰는 이유도 같은 맥락이라고 강조했다. 민주주의 또한 ‘보편적 인권의 영역에 한 명이라도 더 포함되는 과정’이라고 표현을 했는데, 이 주제들 속에서 사례들을 수집한다고 한다. 변희수 하사와 같은 사례가 가장 대표적이다.
민주주의라는 것을 우리가 정말 중요하게 여긴다면 그 민주주의를 가능하게 하는 과정을 방해하는 것들에 대한 정말 집요한 추적이 필요하다. 그래서 이 민주주의를 완성해 나간다는 것은 피 터지는 싸움 같은 것이다. 불평등의 크기를 줄여나가야지만 우리 사회가 좋아지는 것처럼, 평범하게 살아도 그 사람이 인간의 존엄성이 보장될 수 있도록 어떤 사회적 제도를 갖춰야 한다. 민주주의는 모든 질문을 다 허락해서는 안 된다. 불평등의 크기를 줄이는 것을 뭔가 방해하는 질문은 막아야 하는 것이다.

‘능력주의’를 이야기할 때, 1등은 당연히 존재하지만 ‘1등에게 어떻게 대우하는가’는 다른 문제이다. 1등에게 박수를 보내는 것의 의미는 뭘까? 5등은, 꼴등은 노력하지 않았는가? 1등이 노력을 할 수 있는 배경은 무엇이 있는지, 1등을 할 수 있는 환경은 어땠는지를 봐야 함에도 우리는 결과에 박수를 보냄으로써 1등 외 나머지 사람에 대해서는 ‘아무렇게 대해도 된다’는 인식으로 자라나게 된다. 요즘 능력주의를 말할 때 ‘운’과 연관지어 이야기하기도 하는데 우리 사회는 그 운도 실력이라고 한다. 내 실력을 향상시키면 운이 따라온다는 설명도 가능하다. 운도 실력이라는 사회에서는 결국 차별과 혐오가 정당화된다.


"민주주의를 방해하는 고정관념은 무엇이고 어떻게 만들어지는가"

‘자유’를 유지해 나가는 것이 민주주의인데, 이 자유라는 개념은 자유가 없는 사람들에 대한 관심으로부터 시작된다. 예를 들어, 서점에 휠체어가 들어갈 수 있는 보철을 만들었는데 누가 이걸 신고를 했다. 보행하다 걸려서 넘어질 수도 있으니 역차별이라고 얘기를 하는 것이다. 본인이 이를 두고 신고하는 걸 굉장히 정의롭다고 여긴 결과다. 그런데 이 사람은 어떤 실수를 했냐면, 이 인도는 수십 년간 누군가의 차별을 전제로 기본값 자체가 잘못 설정되어 있었던 것이다. 그러면 기본값을 수정해 나가는 과정은 원래 그 인도를 자연적 질서 혹은, 내게 주어진 자유 이렇게 느꼈던 사람이 생각을 바꿔야 되는 것부터 시작되었어야 했다. 그 일상이 달라져야지만 누군가가 더 평등해지는 것이다. 또 하나의 예로 1957년, 미국의 리틀록 나인 사건을 들 수 있겠다.


"그렇다면 인류 공동체는 좀 더 차별과 혐오의 수위가 낮아질 수 있는가"

방향은 정해져 있어야 한다. 우리는 어떤 순간에 어떤 해석을 해야 하는 환경 속에서 살고 있다. 그리고 현대사회는 그런 순간이 훨씬 많아졌다. 우리는 끊임없이 이 변화하는 어떤 세상에 대해 머리를 긁적이며 내가 지금 어떤 해석을 해야만 그 끝에 사회가 좋아지겠는가라는 질문을 늘 상기하고 살아가야 되는 것이다.
평가로 남보다 착하게, 더 친절하게 포장되는 것은 그 결과가 사회적으로 잘못된 결과로 나타날 수 있다. ?능력=노력=열정=도덕>을 전제한 능력주의가 선과 악으로 나누고, 능력에 따라 사람을 깔보는 ‘멸시적 학력주의’ 사회를 만든다. 차별과 혐오가 심해지면, 차별과 혐오를 피해 노련하게 살아남아야 하는 사람들이 많아지고, 차별과 혐오를 차별과 혐오로 여기지 않는 감정이 만연해진다. 차별에 접근하기 위해선 차별과 무관하다고 여기는 것들을 의심해야 한다.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중립이 아니라 ‘길들여짐’에 대한 의심이며, 우리가 일상 속에서 일어나고 있는 차별과 혐오들의 씨앗이 어떻게 뿌려지고, 자라고 있는지 세심하게 점검하고 찾아내야 한다.


"차별과 혐오가 싫다면"

1) 비판 - 과잉 긍정성을 경계하고, 사회 현상을 비판적으로 의심 하는 것이다.
2) 통찰 - 친숙한 것을 낯설게 보면서 좋은 의도의 좋지 않은 결과를 고민한다.
3) 공모 ? 일상 속 차별과 혐오의 씨앗을 찾고 성찰하기



"긍정의 강박에 대하여"

제주는 평화의 섬이라는 얘기가 굉장히 많이 있다. 하지만 그 이면에는 제주 4·3 사건에 대한 아픔이 항상 있다. 제주는 이것에 대한 옳은 해석을 해야 하는 최소한의 합의가 되어 있다. 제주가 평화의 섬인 이유는 역사가 너무 슬프기 때문이다. 아름다운 단어에만 관심을 갖게 되고 그게 과잉 긍정성이라는 어떤 이해 속에 겹쳐지다 보면 그 ‘평화의 섬’이라는 말을 붙일 수밖에 없는 제주도의 역사 자체가 어두컴컴한 이야기 정도로 해석되는 것이다. 우리는 늘 옳은 해석을 해야 하는데, 어떤 순간에는 그런 해석을 하기 위해 그 슬픔에 관해 제대로 이해를 하고 추모를 하고 학습을 해 나가야 한다.
코로나 초기에 유럽 언론들이 이런 식의 보도를 한 적이 있다. 코로나 바이러스를 두고 독일에서 ‘메이드인 차이나’라고 표현을 한 것이다. 21세기 언론이 이렇게 한 나라 자체를 우습게 여기는 보도가 가능할까 싶었다. 유럽과 비유럽을 구분해 온 역사, 동양을 서양의 시선에서 해석해 온 역사, 또 그걸 자연스럽게 받아들인 모두의 태도가 ‘특별한 상황에서’ 혐오로 등장한 것이 아닐까?



"한국사회는 예외일까"

제주 예멘 난민 논쟁에서 우리 사회가 보여줬던 모습은 굉장히 차별적이었다. 언론은 굉장히 자극적인 보도만 한다. 여권의 색깔이 교체된 것만 봐도 그렇다. 특정 종교를 연상케 한다는 이유로 굳이 하지 않아도 되는 일을 한 것이다. 이렇게 우리는 차별과 혐오라는 것을 뭔가 정당화하는 사회 속에서 늘 살고 있다.
우리는 태어나면서부터 경쟁을 통해 살아남기 위해서는 한쪽의 정보를 듣는 게 이롭다. 정말 좋은 사회를 만들기 위해서는 균형을 잘 잡아야 될 텐데 그러기 위해서는 기울어진 반대편으로 관심을 가져야 될 것이다. 중립을 지킨다고 이 의견 저 의견 다 챙기다 보면 이쪽저쪽으로 부채질을 한 번씩 하게 되고, 원래 기울어진 방향으로 떨어질 수밖에 없다.

오찬호 작가는 마지막으로 이렇게 물었다.
“이 강의가 여러분들의 기울어진 반대편 부채질로 기억이 된다면 정말 영광인데, 그것보다 여러분들이 누군가에게 그 기울어진 반대편으로 부채질을 할 수 있는 사람이 될 때 우리 사회가 어떤 좋은 방향으로 나아갈 수 있는 게 아닐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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