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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원 교사 인문학 아카데미

작성자
유승연
작성일
2016.10.17
조회수
7068



2016 수원 교사 인문학 아카데미
"아이들 마음에 불을 밝히는 교사가 되길"


가히 인문학 전성시대다. 수원시평생학습관 300여개 강좌 중 유일하게 빵과 음료를 제공하고, 수원교육지원청과 수원시평생학습관이 공동주관하고 있는 <교사 인문학 아카데미>가 9월 21일 그 첫 삽을 뗐다. 총 8회차로 예정된 교사 인문학 아카데미는 수원시 초중고교 교사들을 매회 다른 강사의 다양한 인문학적 접근으로 초대하는 강좌이다. 조퇴하고 온 선생님, 저녁도 굶고 수업이 끝나자마자 달려온 선생님들로 가득 찬 대강당은 일찍부터 만원사례였다.
대개 본 강의의 맥락과 무관한 자화자찬 일색인 개회연설이 아니라 교사들의 인문학적 소양의 필요성과 그러면서도 편하게 즐기라는 당부가 담긴 김기서 수원시 교육지원청 교육장과 정성원 수원시 평생학습관장의 인사말은 적절하고 감동적이었다. 저분들이 있는 한 수원시교육계의 미래는 LTE, 아니 LED급으로 밝을 것이다.
 
교사의 행복 없이 어찌 수원교육의 미래를 말할 수 있을까? 그러한 고민에서 나온 첫 강의는 성공회대 교양학부 김찬호 교수의 '말, 마음 그리고 삶'이다. 저서 『모멸감』이 '2015 서울시민 한 책 읽기 도서'로 선정되었을 정도로 잘나가는(?) 김찬호 교수는 수업의 근간을 이루는 교사와 학생 간의 소통에 대해 누구보다 많이 연구한 사회학자이다. 강사는 6하원칙을 매개로 학교 교육 현장에서 일어나는 상황을 분석하고 소통을 위한 인문학적 성찰을 제안했다. 이 글에 강의 내용을 옮겨보겠다.
 
첫째, what은 교과과정으로 콘텐츠를 의미하며 무엇을 가르칠 것인가의 문제이다. 소통이 잘 안 되는 상대는 생각이 다르거나 대화의 콘텐츠가 부족한 사람이다. 여성학자 박혜란은 남편이 말이 없어서 멋져 보여 결혼했는데 살아보니 생각이 없는 거였다, 라고 말했다. 한국 영어교육은 코드만 있지 콘텐츠가 없어 교육 효과가 떨어진다. 많이 읽고 많이 경험하면 대화 시 주제가 풍부해진다. 무한대의 정보가 떠도는 시대에 정작 나의 스토리보드는 없다. 무분별한 정보를 적절하게 제어하고 내 안에서 가공하여 내 안에 무엇을 만들 것인가를 고민해야 한다.
 
둘째, how는 교수학습을 말하며 똑같은 말이라도 어떻게 전달하는가의 문제이다. 사람을 기분상하게 하는 건 말의 내용이 아니라 말투, 표정이다. "한마디 하겠는데", "이런 말 안 할라고 했는데"로 시작하는 말은 어차피 기분이 나쁘다. 예를 들어 유시민의 문제는 올바른 말을 하지만 싸가지 없이 하는 것이다. 주최 측에서 시작 전에 준 빵(콘텐츠)을 던졌다면(전달방식) 기분이 나빴을 것이다. 콘텐츠가 없는 것도 문제지만 전달방식이 더 중요하다. (본인의 책 제목이라고 깨알 홍보하면서) 모멸감을 느끼는 것은 방식의 문제이다.
 
셋째, when은 타이밍이다. 말을 잘하는 것과 소통을 잘하는 것은 다르고 오히려 상처를 줄 가능성이 높다. 논어의 '눌언민행'에 나오는 눌(訥)은 어눌, 지눌법사 등에 쓰이는 한자로 말을 더듬거린다는 뜻이다. 얼마 전 나온 강사의 신간 『눌변』은(기막힌 홍보 타이밍! 이라면서 다시 한번 타이밍 강조) 신중하라, 한번 더 생각하고 말하라는 의미이다. 동양에서는 논쟁을 중요시하지 않았다. 서양은 소피스트들에게서 보듯이 논쟁이 중요한 문화다. '눌'에서 중요한 것은 타이밍으로 분노를 삭힐(holding) 시간이 필요하다.
 
넷째, where는 공간, 장소로where(공간)와 when(타이밍)을 합치면 context(맥락)가 된다. 아이를 어디서 혼내는가, 다른 사람이 없는 데서 지적하거나 말해야 한다. 인간은 몸을 가진 존재이므로 인간의 마음은 공간과 많이 결부된다. 강사를 (1년 여의)우울증에서 회복하게 한 것은 아침마다 라디오를 들으면서 하는 1시간의 운동이었다. 관계가 안 좋은 사람과는 다른 공간에서 만나본다. 소통의 스킬 중에는 상대를 만날 공간을 잘 고르는 것도 포함된다. 수학교사 출신인 엄마를 두고 수학을 못하는 둘째 딸을 레스토랑으로 데려가서 1시간 이야기한 적이 있는데 수학이야기는 안하고 너의 강점은 이러저러한 것이라는 이야기만 했다. 만약 그 이야기를 집에서 했다면 별로 먹히지 않았을 것이다. 감동한 딸은 집에 가기 전에 "아빠, 내 장점 다시 요약해줘."라고 했다.
 
다섯 째, why는 동기이며 왜 그 말을 하는가이다. 소통이 잘 되려면 상호작용 시 나(화자)를 위한 것인지, 상대(청자)를 위한 것인지 동기를 살펴야 한다.  한국의 의례에서 자신의 지위를 확인하려는 동기에서 행해지는 연설은 듣는 사람을 불편하게 한다. 자신이 얼마나 중요한 지가 관심사인 사람이 "나 이런 사람이니, 무시하지마." 하는 태도로 연설한다. 오늘 인사말을 한 두 분은 그렇지 않아서 정말 감동이었다. 그렇게 하기가 쉽지 않다.
좋은 질문은 (상대가) 듣고 싶은 이야기를 하거나, (상대가) 하고 싶은 말을 질문하거나 (상대가) 답을 하면서 자신도 모르던 것을 새롭게 깨닫게 해주는 질문이다. 이와 반대되는 경우가 명절에 기성세대가 젊은이들에게 (단지 호기심에서) 하는 질문이다. 하고 싶지 않은 이야기를 듣고 싶지 않은 사람에게 하는 것의 대표적인 예가 무엇일까? 바로 '수업'이다. 우리나라에서 아이들이 공부하려 들지 않는 것은 공부하는 목적(동기)이 확실하지 않기 때문이다. 이에 대해 생텍쥐페리는 멋진 말을 했다.
"바다로 나가는 법을 가르쳐주려거든 배 만드는 법만을 가르치면 안 된다. 그 배로만 바다로 나가려고 하기 때문이다. 대신 사람들로 하여금 바다를 미치도록 그리워하게 하라. 그러면 어떻게 해서든 그들은 바다로 나가려 할 것이다."
 
여섯 째, who는 교사는 누구인가, 로 정체성의 문제이다. 아재와 꼰대는 "내가 왕년에~"로 말을 시작하거나 "내가 누군지 알아?" 라고 한다. 아리스토텔레스는 『수사학』에서 설득의 3가지 요소로 로고스(logos), 파토스(pathos), 에토스(ethos)를 들며 논리적 타당성인 로고스가 10%, 정서적 공감인 파토스가 30%, 화자의 인격에 해당하는 에토스가 60%를 차지한다고 하였다. why와 who의 문제이다. 히틀러는 파토스를 잘 이용했으며 정치인은 에토스가 부족하다. 안철수가 기존 정치인들보다 에토스에서 돋보였으며 사기꾼은 에토스가 부족하다.
 
'상대방을 내가 어떻게 바라보고 있는가'에 따라 소통의 상당부분이 지배되고 흘러간다. 상대가 나를 어떻게 여기는지를 알지 못하기 때문에 불안한 것이다. 어떤 상대를 대면하고 싶지 않은 이유는 상대의 인지체계 속에 내가 어떻게 자리매김되는가 하는 프레임의 문제이다. 교사가 아이를 어떻게 바라보는가가 중요하다.
다문화 가정의 아이들에게 줄 서류가 있을 때 모든 아이들이 있는 교실에서 "다문화, 남아."라고 아이를 호명하는 교사는 아이들을 처리대상으로 본 것이다. 에토스(인격)는 감정, 의지, 욕망과 같은 마음에 의해 좌우된다. 우리는 마인드풀(mindful, 마음 챙김으로 번역 가능)해야 한다. 지금 이 순간 깨어서 자신을 객관화하고 성찰하고 내 마음이 이렇구나 하고 알아채는 것이다. 반대는 마인드리스(mindless, 마음 놓침으로 번역)이며 관성에 따라 화를 내는 것이고 의심이 많고 편견에 매몰되는 것이다.
 
마인드풀이 중요한 이유는 '나'를 구성하는 것이 유동적이기 때문이다. (나의 행동이나 감정이) 내가 선택한 것인가? 그냥 습관적으로 굳어진 것인가를 구분해야 한다. 잔소리를 안 해야겠다고 결심해도 그냥 나온다. 그렇게 틀이 지어져 있고 경로의존성 때문이다. 나와 상대방 모두에게 깨어있자. 상대방이 왜 그럴까를 관찰하고 매듭을 풀어가는 것이 중요하다. 이 때 소통과 경청이 일어난다. 그러기 위해서는 명상과 같은 훈련이 필요하다. 명상은 '이완된 각성'이다. 편안한데 모든 걸 다 느끼고 바라보는 것이며 모든 것을 수용하는 것이다.
 
경청은 액티브 리스닝(active listening)이며 온 마음으로 듣는 것이다. 경청이 안 되는 것은 내가 내 생각에 매여 있으면 상대방을 잘못 보기 때문이다. 학생들이 교사를 자유롭게 바라본다면 수업은 쉬울 것이다. 자유의 반대는 관성에서 습관처럼 하는 것이다. 바로 이 관성을 깨는 것이 인문학이다. 봉준호 감독은 대중교통을 이용하면서 사람들을 관찰하고 그들의 스토리를 상상해 본다고 한다. 타자에 대한 상상이 바로 창의성이다. 소통이 힘든 이유는 상대에 대해 단정짓기 때문이다. 단정짓지 않고 내가 상대에 대해 모른다는 것을 인정할 때 소통이 가능해진다. 판단을 중지하고 애매함을 견디는 능력이 창의성이다.
상대에 대해서 모르는 부분을 (상상력, 호기심으로) 비워두면 된다. '내가 모르는 뭔가가 있을 거야', '그럴 수도 있지'라고 생각하는 것이 인문학적 상상력이다. (상대에게) 짜증이 날 때 이것을 적용하면 마음이 편해질 수 있다. 내가 나를 방어하는 것이다. 인지가 감정을 좌우한다. 내가 화가 안 나는 방향으로 상상하는 것이 도움이 된다. 학생에게 "넌 지각쟁이야"라고 했을 때 명사는 개념이며 단정짓는 것으로 평가와 판단을 포함하게 되어 학생은 상처를 받게 된다. 반면에 "오늘 늦었구나"라고 할 때는 있는 사실을 지적하는 것이며 현상만을 보는 것이다. (마인드풀 상태의) 사랑은 모르는 채로 내버려 두는 것이다.
 
공자는 뭘 모르는지 아는 게 진짜 지식이라고 했다. 모른다는 것이 인간 본연의 모습이다. '모른다'는 뜻의 단어는 한국말에만 있다.(대부분의 언어에 I don’t know, Je ne sais pas 등 '알지 못한다'는 말만 있음) 아재개그는 맥락이 필요없고 그 말 하나만 달랑 존재해서 썰렁하다. 소통은 맥락을 잘 읽어내는 센스이다.
내가 상처 덩어리인가? 트라우마가 나를 잡아먹는가? 상처의 주인이 되어라, 상처가 나의 주인(상처의 권력화)이 되지 않게. 그래야 상처를 다루고 해석할 수 있다. 내 마음의 바탕(뿌리)을 더듬어 보고 상상(mindful)하는 것이 창의성이다. 하루하루 내 경험을 창조하고 내 마음을 창조하는 것이 중요하다. 그래야 똑같은 상황에서도 다르게 반응할 수 있다. 화낼 상황에서 화를 안내거나 나 자신을 다르게 연출하는 것(뜻밖의 반응을 보이는 것)이 내공이다.
 
서로 모르는 것에 겸손해야 관계성이 좋아진다. 칸트도 책을 많이 안 읽었다고 한다. 대화가 중요하다. 평생학습의 열매는 내가 모르는 무언가(성현의 말씀, 우주의 신비 등등)를 끊임없이 만나는 것이다. 크리슈나무르티는 "판단과 평가가 없는 관찰이 최고의 지성"이라고 하였는데 이런 순간에 자기를 만나는 것이다. 반드시 친밀하지 않아도 깊이 들어갈 수 있다. 오늘 강의의 청중 여러분과 강사처럼…
안전한 관계는 상처(어둠, 그늘, 취약함)의 고백에서 시작된다. 브레네 브라운(Brene Brown)은 "나는 왜 내 편이 아닌가"라는 강연에서 '취약함(vulnerability)'은 감정적 리스크, 드러내기, 불확실성이며 사람을 연결시키는 근거가 된다고 하였다. 이게 안되어서 불안하므로 사람들은 권력으로 자신을 방어하며 쓸데없이 높은 지위를 추구하여 남을 누르려고 한다. 안전한 공간은 믿음이 있는 곳이다. 힘들 때 아무 걱정 없이 찾아가서 울 수 있는 사람이 있는가? 미국 금문교에서 어떤 사람이 자살하러 가면서 한 사람이라도 말리면 안 죽으려고 했는데 아무도 안 말려서 결국 죽는다는 내용이 나중에 발견된 유서에 적혀있었다.
글을 쓰는 건 눌변일 수밖에 없다. 배설하듯 쓰는 말이 문제다. 요즘 유머는 너무 얍상하다. 썰렁하다는 말로 누르는 얄팍한 개그는 이휘재에서 시작되었다고 생각한다. 남의 유머를 누르고 판단하는 것이다. 인생에도 개그에도 바보스러운 것이 허용되어야 한다. 응팔의 사수생 캐릭터 같은…
 
강의도 좋았지만 질의응답을 통해 더욱 확실하게 아이들과의 소통에 대해 배울 수 있었던 시간이었다. 빵 하나 주고 2시간을 잡아두었는데도 족집게 강사의 수업을 듣는 수험생처럼 필기까지 해가며 끝까지 경청하는 교사들의 반짝이는 눈빛이 지금도 잊혀지지 않는다. 질의응답이 끝나고 강사는 마무리를 청했다.
토요일에 오랜만에 주례를 하게 되었는데 그때 아들의 신부를 선택하는 왕의 이야기를 할 생각이라고 한다. 왕은 3명의 신붓감에게 돈을 주고 방 하나를 가득 채우라는 요구를 했다. 첫 번째 후보는 돈으로 옷감을 사서 채웠는데 실패, 두 번째는 지푸라기를 사서 채웠으나 역시 실패, 세 번째는 촛불을 사서 밝혀 불빛으로 방을 채워서 신부가 되었다. 예이츠는 "교육은 양동이를 채우는 것이 아니라 불을 밝히는 것"이라고 하였다. 김찬호는 오늘 이 자리에 참석한 교사들이 아이들의 마음에 불을 밝히는 교사가 되기를 바란다는 말로 강의를 끝맺었다.
 
질의응답 시간에 교사들의 질문에 답변하면서 김찬호 교수는 법륜스님이 된 것 같은 느낌이 든다고 하였는데 그만큼 교육 현장에서 교사들이 느끼는 고민의 무게가 고스란히 느껴졌다. 그 무엇보다 아이들의 행복을 중요하게 생각하는 교사들이 인문학을 만났을 때 그 시너지 효과는 메가톤급이 되지 않을까? 수원 교사 인문학 아카데미를 통해 변화될 선생님과 수업에서 그들을 만날 아이들의 미소가 보이는 듯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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