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길위의 학교-3차 답사 우리 농업의 출발지 ‘서호’를 돌아보며

작성자
김소라
작성일
2013.10.23
조회수
6570/1



<길위의 학교-3차 답사 우리 농업의 출발지 ‘서호’를 돌아보며>
 
 
우리 농업의 출발지 ‘서호’를 돌아보며
 
단풍이 울긋불긋 조금은 수줍게 자태를 드러낸 10월의 중순이다. 수원 지역 곳곳을 발로 걷고 눈으로 담는 ‘길 위의 학교’ 세 번 째 시간은 바로 서호이다. 지금껏 서호공원, 서호 저수지 정도로 알고 있었고 사람들이 휴식하는 도심 속 자연이라고만 여겨온 곳이다. 아이 데리고 어릴 때 나들이도 자주 왔었고, 볕 좋을 때는 돗자리 깔고 휴식을 취하곤 했던 곳이다. 수원역에서 전철을 타고 서울 방향으로 갈 때면 항상 화서역 인근을 지날 때 너른 논과 호수가 보이는데 바로 그곳이 서호이다. 오늘 답사 해설은 수원의 입담, 정조와 화성 연구가이신 경희대학교 후마니타스 칼리지의 김준혁 교수님이다. 익히 여러 번 강의를 듣고 해박한 지식과 함께 사람들과 교감하는 능력이 탁월하시기에 이번 시간도 기대가 되었다.
 
사람들과 함께 모인 곳은 화서역 인근의 서호생태수자원센터이다. 9시 30분에 시간이 되어 사람들이 모이자 서호생태공원을 통하여 걷기 시작했다. 지금은 공원으로 조성된 지 몇 년 되었지만 전임 시장이 서호생태공원을 골프장으로 만들려고 했었다는 에피소드를 들려주셨다. 아마도 이곳에 골프장이 만들어졌다면 소수의 사람들만 이용하는 곳이 되었으리라. 당연히 골프장 건립은 과거 정조대왕이 생각해도 괘씸한 생각이었을 것 같다. 백성들을 위해 저수지를 짓고, 먹고 살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만석거를 만들어 농사를 짓게 하였던 곳인데 말이다. 어쨌든 화서동과 인근 정자동 시민들이 편안히 이용할 수 있는 체육공원, 생태 학습장으로 만들어진 모습이 보기 좋다. 서호 일대는 경기도 기념물로 지정된 보존 국유지라서 함부로 변경허가를 하기가 쉽지 않은 곳이다. 앞으로도 대대손손 수원의 역사를 상징하는 곳, 우리 농업의 출발을 기억하게 하는 곳으로 서호가 남아있으면 좋겠다.
 
“서둔은 둔전이라고 하며 군대를 운영하기 위한 재원을 마련하기 위한 곳입니다. 국영농장을 지어서 나라의 살림을 꾸려나간 곳이죠. 군대의 재원이 되는 곳이 둔전인데, 바로 이순신의 첫 번째 관직이 함경도 녹둔이었습니다. 지금 북한과 러시아의 접경 지역에서 둔전 감독관으로 일했습니다. 명량해전, 노량해전, 한산도 대첩만 기억하죠? 이순신도 처음에는 아주 낮은 관직에서부터 시작하였답니다. 군인들이 당히 했던 일 중 하나가 농사일이기도 했습니다. 과거 둔전은 주로 관노들에게 일을 시키고 토지 없는 백성에게 임대를 하였습니다. 그런데 정조가 만석거를 만들면서 기존에 착취의 대상이었던 둔전을 혁신하고자 했습니다. 그래서 보통 7:3 정도의 일반적인 소작료를 획기적으로 5:5로 국가와 소작인이 나누는 제도를 만들었답니다. 당시로서는 개혁적인 일이죠. 그래서 정조는 개혁군주라고 불리는 것입니다.”
 
 
서호에 이런 역사적인 의미가 있다니 놀라울 따름이다. 서호의 본래 이름은 축만제로서 1799년에 만든 저수지다. 저수지의 물은 과거부터 광교산에서 흘러내려오는 것으로서 수원비행장 쪽을 거쳐서 화성을 지나 서해로 흘러간다. 수 백 년 전부터 지금까지 농사의 생명줄 같은 물로써 지금은 수원시민들에게 휴식과 안락함을 주는 물로 이용되는 셈이다. 처음에 수원 장용영 군사들과 토지 없는 백성들에게 생계의 기반을 만들어 주기 위해 만들었다. 그런데 군인과 함께 군인 가족들이 참여할 수 있도록 하여 백성의 경제적인 안정을 취하게 하였다. 바로 백성을 사랑하는 마음 애민정신의 시작이라 할 수 있는 정조 대왕의 마음이 가장 진하기 묻어난 곳이 서호라 할 수 있는 셈이다.
 
거기다가 농사를 짓는 농민들에게 2집 당 1마리씩 소를 지급하였다고 한다. 1년이면 소가 송아지를 1마리씩 낳게 되니 개인이 소를 집집마다 갖게 되었다. 당시 소 한 마리를 집에 갖고 있는 것은 먹고 살 수 있는 탄탄한 기반이 마련된 정도라 보면 된다. 소를 무상으로 지급하고, 쟁기와 같은 농기구, 씨앗 사용료까지 화성유수가 지출하도록 하였다고 한다. 당시 수원시민들은 얼마나 행복한 백성이었을까. 지금 이 시대에도 정치하는 사람들이 국민들의 먹고 살 수 있는 기반을 충분히 만들어주어야 하지 않을까 생각하게 하는 대목이었다.
 
 
서호 저수지를 걷는 길은 자연친화적인 옛 그대로의 길이다. 그래서 새롭게 조성된 공원과는 비교할 수 없을 만큼 안락함을 준다. 인공적으로 조성된 조잡한 시설물들이 많지 않아서 더욱 친근하다. 대낮에도 운동하고 걷는 사람들이 많을 만큼 인근 주민들에게는 휴식공간이 되는 곳이다. 서호 저수지에서 농업진흥청으로 들어가는 길로 이어지는데 시간이 충분하다면 ‘농업과학관’을 둘러보아도 좋을 것 같다. 아이들과 함께 농기구 및 농사법 및 씨앗, 종자에 대한 전시물을 볼 수 있고 농업에 대한 이해를 도울 수 있는 전시관이기도 하다. 현재 농촌진흥청은 100년의 역사를 갖고 있다고 한다. 하지만 이는 일제 강점기인 1906년부터 이루어진 권농 모범장의 시작에서부터 계산하였을 때이다. 우리나라의 과학 농업의 역사를 일제 강점기로부터 셈하여 100년이라고 하면 억울해할 사람들이 많다. 이미 정조대왕이 만들어 놓은 만석거, 축만제 뿐 아니라 농법을 연구하는 연구소 개념의 시범 농토까지 있었다고 하니 말이다. 교수님은 우리 농업의 역사를 다시 써야 하는 때가 아닐까 이야기하신다.
 
이번 서호 답사에서 찾아보았던 곳 중 하나는 여기산에 있는 우장춘 박사의 묘소이다. 농촌진흥청 내의 출입금지 구역인 등산로를 따라 올라가면 우장춘 박사의 묘소가 나온다. 씨없는 수박을 만든 우장춘 박사는 이곳에서 평생 식물, 농업 연구에 몸을 바친 분이다. 여기산에서 또 한 번의 역사와 마주하게 되니 감회가 새롭다. 또한 여기산은 화성 축성에 필요한 돌을 기적처럼 찾아낼 수 있었던 산이기도 하다. 수원에 살면서도 여기산을 처음 올라와보았고, 높지 않은 산이지만 역사적으로도 의미 있는 곳임을 기억하게 된다. 숲길로 이어진 야트막한 등산로와 같은 여기산 오르는 길도 잊을 수 없을 것 같다.
 
 
서호답사는 농촌진흥청 안의 벤치에 앉아서 도시락을 먹는 것으로 마무리되었다. 아침부터 서둘러 무언가를 배우기 위해서 열정적으로 참여한 사람들의 모습, 두 시간 넘게 김준혁 교수님의 말씀에 홀딱 빠져서 듣는 모습이 인상적이었다. 길 위의 학교라는 타이틀에 걸맞게 내가 사는 모든 곳곳이 배움의 현장임을 알게 된다. 길 위에서 만나는 사람들이 바로 선생이다. 그리고 과거부터 존재해왔던 길 위에서 마주하는 역사적 흔적은 지금의 삶의 토대를 굳건히 한다.
 
마지막으로 김준혁 교수님께서 1시간 답사 시간을 채우지 못한 것을 미안해 하며 11월 7일 목요일에 강의와 함께 점심식사, 화성 답사까지 연이어서 함께 해주신다고 한다. 아니, 서비스 강의와 답사가 더욱 기대된다. ‘길 위의 학교’를 지금껏 참여한 수강생들을 위한 배려라고나 할까. 수원평생학습관과 길 위의 학교, 그리고 김준혁 교수님과의 인연이 계속 이어지길 바란다.
 
글_김소라(공정여행가 1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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