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길위의 학교-1차 답사 빛의 가르침, 광교산 후기

작성자
최지영
작성일
2013.10.17
조회수
5550/1



<길위의 학교-1차 답사 빛의 가르침, 광교산 후기>
 
광교산, 숲에서 배운 삶의 지혜
 
광교산, 첫 만남
10월 5일 토요일. 두 번째 길 위의 학교 프로그램이자, 첫 번째 답사 일정이 시작되었다. 이번 길 위의 학교 주제는 수원을 대표하는 자랑거리인 광교산이다. 날씨도 화창해서 왠지 집에 있기 아쉬움이 남을 날씨다. 소풍 나온 기분으로 광교공원 강감찬 동상앞에 모였다. 14명의 여행 길벗들과 4명의 스텝 도우미. 그리고 오늘의 여행 길잡이가 되어주실 김현희(수원환경운동연합 교육팀장) 선생님. 이들이 이번 ‘광교산 길 위의 학교’의 길동무들이다.
   
 
우리의 첫 만남은 신발로 시작되었다. 둥글게 서서, 각자의 신발 한 짝을 원 안에 벗어 넣었다. 이렇게 신발을 보니 여기 모인 사람들 만큼이나 참 각양각색이다. 그리고 어떤 사연들이 있을지 궁금해진다. 자기소개를 신발소개로 해보자고 제안하신 김현희 선생님의 특이한 인사법이다. 김현희 선생님은 산, 하천, 생태교육을 아이들과 함께 진행하신다고 한다. 이번 길 위의 학교는 광교산의 풀, 나무, 식물에 대해 알 수 있는 여행길이 될 것이라고 하셨다. 신발에 대한 소개가 진행된다. 2년이 되었지만, 새 신 같은 신발의 주인공이자 농촌체험 보조강사로 활동하시는 분도 계시고, 구멍 난 신발에 대한 애정을 말씀해 주시는 분, 다이어트 하려고 샀는데 너무 안 달았다며 웃음 지으시는 분, 딸 운동하라고 사준 신발을 신지 않아서 대신 신고 오신 분. 길 위의 학교를 위해 새로운 신발을 샀는데 아직 편하게 맞지 않는다는 분, 방수신발이라고 해서 샀는데 방수가 되지 않아 맑은 날만 신게 된다는 분. 공짜신발인데 많은 곳을 여행했고, 튼튼해서 좋다는 분, 짝사랑 하던 사람과 산에 가려고 구입했다가 같이 산에는 거의 가지 못하고 그냥 막 신고 다닌다는 분. 이렇듯 다양한 사람들과 함께 광교산 길 위의 학교가 시작되었다.
   

광교산 나무 이야기
광교산 둘레길을 걸으면서 숲에 사는 다양한 식물에 대한 이야기를 들을 수 있었다. 광교산 초입에서 만난 것은 단풍나무였다. 단풍나무는 그냥 단풍나무라고 생각했는데, 잎이 갈라진 정도와 프로펠러를 닮은 단풍나무 열매의 각도와 크기 등에 따라 다양한 단풍나무로 분류된다. 우리나라 단풍잎은 5~6개로 나뉘어져 있고 숲에 있는 당단풍은 더 많이 갈라진 특성이 있다고 한다. 그리고 가로수로 많이 보곤 하던 메타세콰이어는 공룡시대부터 있어왔는데 다시 복원되어 현재까지 이르고 있다는 것도 새로웠다. 참나무과에 속하는 나무로는 상수리 나무, 굴참나무, 신갈나무 등 6종이 있다고 한다. 임금님 수라상에 많이 올라서 상수리 나무, 제일의 맛을 자랑하는 굴참나무, 높은 산에서 자란다는 신갈나무. 보기에는 비슷비슷 한데 김현희 샘은 참 섬세한 눈으로 구분해서 설명해 주신다. 그리고 친숙한 나무들에 대한 몰랐던 이야기가 흥미로웠다.
 

나무박사 김현희 샘의 설명으로 둘레길에 있는 왠만한 풀, 나무에 대한 설명은 다 들은 것 같다. 기본 상식이 약했던 나로서는 나중에는 헷갈리기가 일쑤고, 기억이 날듯 말듯 하다. 열심히 듣고, 이것저것 메모해볼 뿐이다. 나무와 풀에 대한 설명을 들으면서, ‘숲이야 말로 삶의 지혜가 녹아있는 곳이구나’하는 생각이 들었다. 나에게 그런 생각의 거리들을 던져준 몇몇의 나무와 풀에 대한 소개를 해 보고자 한다.
 

숲의 선생님들
쑥 꽃을 본적이 있는가? 쑥에서 꽃이 핀다는 것도 생소했지만, 쑥이 어엿한 풀처럼 크고, 소박한 꽃을 피운다는 것이 놀라웠다. 쑥은 봄에 보았던 그 모습으로, 잔디처럼 계속 있을거라고 생각했는데 말이다. 그러고 보면 쑥을 캐는 봄이 지나면, 그 쑥은 모습을 찾을 수 없었던 것 같다. 그래서 쑥은 봄에만 자라는 식물이라고 생각한 것 같다. 사실 쑥은 꽃도 피고, 크기도 꽤나 자라는 풀이었던 거다. 쑥에 대한 일부의 모습만 보고, 쑥은 이러이러 하다며 너무나 확고한 생각을 가지고 있었다는 생각이 들었다. 마치 코끼리 다리를 만져보고 코끼리는 기둥과 같다고 확신해 버리는 장님이야기처럼. 혹시라도 어떤 사람에 대해서도 그런 생각을 갖고 있는 것은 아닐까? 쑥의 변신한 모습을 보며 내가 알고 있는 것이 다가 아니라는 것을 강하게 하게 되었다. 일부 알고 있는 것으로 독단하지 않기를. ‘안다’하는 것에 대한 겸손함이 필요하다는 생각을 하게 되었다.
 

우리에게 ‘아카시아 나무’라고 알려져 있는 이 나무의 정식명칭은 ‘아까시 나무’라고 한다. 내가 알고 있는 아까시 나무는 꿀이 있다는 것. 어렸을 때, 코끝을 간질이며 향긋한 향기를 뿌리던 나무라는 것. 친구들과 아카시아 꿀을 쪽쪽 빨아먹던 추억과 동글동글한 잎사귀를 손가락으로 튕기면 휘리릭~ 날아가던 놀이가 되는 그런 나무라는 기억이 있다. 좀 더 세월이 지나서는 아까시 나무가 번식력이 좋아서 다른 식물들이 잘 자라지 못하게 한다고 해서 그렇게 좋기만한 나무는 아니구나 했던 기억이 있었다. 그런데 오늘 알게 된 것은, 아까시 나무가 콩과(科)식물로 질소를 보존하여 땅이 기름기제 하는 효과가 있다고 한다. 어떤 존재에 대한 생각은 시시때때로 다르게 느껴진다. 단편적인 정보만 가지고 이것이 좋다 나쁘다 판단하는 것은 위험한 생각인 것 같다. 그래서 숲 속에는 아까시 나무도 없어져야 할 존재가 아니라 함께 어울어져 살아야할 존재인 것이다.
 

길을 가다가 선생님이 묻는다. “이 나무가 어떤 나무인지 아시는 분 계세요?” 길 동무 중에 한분이 “진달래 나무요”라고 대답한다. 진달래 나무라구? 봄이 되면 참으로 많다고 느껴지고, 금방금방 눈에 띄는 것이 진달래 나무이다. 꽃을 보고서야 진달래 나무임을 알 수 있었다. 그러다보니 봄 이외의 계절에는 생각해 본적이 없었다는 것이 생각났다. 진달래 나무의 생존전략은 다른 나무보다 빨리 꽃을 피우는 것이다. 잎사귀가 나오기도 전에 꽃부터 피워내는 부지런함이 있다. 잎사귀가 없어서 꽃이 더 선명해 보이고, 왠지 가냘퍼 보였는지도 모르겠다. 그 여리여리한 진달래 꽃의 적극적인 생존전략이 신선했다. 자신의 진가를 에두르지 않고 단박에 꽃으로 보여주는 진달래꽃. 그 잎사귀를 보니 맑은 빛깔로 사람들의 시선을 사로잡고 미소를 짓게 했을 봄의 모습이 상상된다. 그렇게 묵묵히 숲속에서 다른 계절을 보내고, 봄의 시작을 알리는 전령사가 되겠지.
 

생강나무. 가지에서 생강냄새가 나서 생강나무라고 한다. 산동백나무라는 이름을 가지고 있으며, 다른 길동무에게서 김유정의 소설에 나오는 동백나무도 이 생강나무라는 이야기를 들었다. 생강차 대용으로 끓여먹기도 한다는데, 생강에 대한 이야기도 흥미로웠지만, 생강나무의 잎사귀의 모습에서 감동을 받았다. 생강나무 잎사귀는 약간 넓은 편인데, 위 쪽에 나 있는 잎사귀는 그냥 동그란 모양이고, 아래쪽에 나 있는 잎사귀는 3개의 잎사귀로 갈라져 있다. 같은 나무에서 이런 다른 잎의 모양을 한다는 것이 신기했다. 그 이유는 더욱 멋있었다. 아래에 있는 잎사귀가 갈라진 것은 빛을 더 많이 받기 위해서 라고 한다. 그런데, 만약 위에 있는 잎사귀가 더 많은 햇빛을 받겠다고 자기도 3개의 잎사귀를 가진다면 어떻게 될까? 아래에 있는 나뭇잎은 더 많은 잎사귀를 가지기 위해 노력해야 하거나, 살기가 힘들어 질 것이다. 생강나무의 위쪽에 위치하고 있는 잎사귀는 그냥 자신에게 필요한 만큼만, 한 개의 잎사귀로 만족한다. 사람들은 가지면 가질수록 더 갖고 싶어지는 욕망이 있는 경우가 많다. 생강나무의 그 한 개의 잎사귀가 유난히 예뻐 보이는 것은 만족할 줄 안다는 것. 그리고 서로를 배려하며 조화를 이루는 그 모습이다. 생강나무 잎은 지족과 겸손과 배려를 조용히 알려주는 것 같다.
 

로간주 나무라는 것을 보았다. 이 나무의 생존전략은 척박한 땅에서 자란다는 것. 왠만한 나무들은 겨울에 잎사귀를 떨구고 뿌리에 집중하는 반면, 로간주 나무는 겨울에도 잎사귀를 떨구지 않고 바늘모양의 잎사귀에 당분을 보관하여 생존한다. 이 나무는 왠만한 나무들이 기름진 땅을 찾아나설 때, 척박함 속에 적응하여 살아남는 방법을 선택했다. 척박한 땅 속 보다는 잎사귀에 양분을 저장한 것도 나름의 방법이 아니었을까? 우리는 더 좋은 기회를 위해 더 좋은 곳으로 눈을 돌리기 마련이다. 기회의 땅은 척박한 이 곳이 아니라. 왠지 저 멀리 더 좋아보이는 저 곳인 것 같은 생각이 들기 마련이다. 로간주 나무는 기회의 땅은 저 멀리 있는 것이 아니라 지금 내가 있는 이 곳일 수 있다는 것을 보여준다. 로간주 나무가 있다는 것은 척박한 땅이라는 증거라고도 하지만, 모두가 떠난 땅에서 홀로 생명력을 잃지 않고 당당히 생존하는 그 모습에서 상록수처럼 부르른 기상이 엿보이기도 했다.
 

팥 모양의 열매를 가진 팥배나무의 열매는 새들에게 인기만점이라고 한다. 팥배나무의 생존전략은 새들에게 맛있는 열매를 제공하고, 새의 몸을 거쳐 배설됨으로써 종족번식을 한다. 새는 자유롭게 날아다니기 때문에 확장성을 넓힐 수 있는 것이다. 식물과 동물의 승승전략이다. 같은 종을 뛰어넘어 이 같은 전략을 펼치는 팥배나무의 센스가 놀랍다. 어쩌면 나눔의 메커니즘 같기도 하다. 내가 상대를 위해 좋은 것을 제공하는 것이, 결국은 나에게 돌아올 수 있다. 다람쥐와 도토리도 이런 관계이다. 도토리 나무는 다람쥐에게 도토리를 제공하고, 다람쥐는 도토리를 땅에 숨겨두어 저장한다. 땅에 숨겨둔 도토리의 일부는 새로운 도토리 나무로 자라는 것이다. 그런데 만약 다람쥐가 너무 똑똑해서 숨겨둔 것을 다 먹어버린다면 도토리 나무에게는 별로 이익이 되지 못할 것이다. 다람쥐는 센스있게 적당히 똑똑하다. 혹은 알고 있지만, 적절히 토토리를 배려하는 것인지도 모르겠다. 서로에게 도움이 될 수 있는 이런 관계는 다른 사람과의 관계에 있어서도 배우면 좋을 것이다. 너무 내 것만 챙기기보다는 약간의 빈틈이 둘의 관계를 더욱 조화롭게 하는 것 같기도 하다.
 

산불은 좋은 것일까? 나쁜 것일까? 이런 질문이 가능한가? ‘산불은 당연히 나쁜 것이다.’라고 배웠기 때문이다. 산불이 좋은 것일 수 있다는 건가? 미국에서는 산불이 나도 특별히 끄지 않는다고 한다. 땅이 넓은 나라여서 가능한 것 아닌가 하는 생각도 들었지만, 산불은 숲을 무의 상태로 만들어 새롭게 초본부터 목본까지 시작할 수 있는 기회의 땅을 만드는 결과가 된다는 것이다. 모든 것은 짧게 보면 좋고 나쁘고가 있지만, 또 길게 보면 꼭 그렇지도 않은 것이다. 순간적으로 닥친 불행이 가끔은 새로운 시작을 하게 하기도 하고 그 불행으로 인해 더 큰 행복으로 가는 경우도 있지 않은가? 산불 이야기를 들으며 산다는 것은 일희일비(一喜一悲) 하기보다는 더 큰 의미가 무엇일까 생각해 보는 것도 좋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마로니에가 식물이라는 것을 알고 있는가? 마로니에라는 나무를 접하면서, 마로니에는 듣기에 예쁜 지명이거나, 불어로 어떤 의미가 있지 않을까? 그리고 마로니에라는 가수가 있다는 정도로 생각했다. 그 이상의 호기심도 없었다. 그런데 그 마로니에가 나무였다. 그리고 열대지방을 연상하는 그런 큰 잎을 가진 나무. 마로니에를 보면서 내가 모르고 있는 것이 얼마나 될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그리고 이 세상에는 또 얼마나 알 수 있는 것이 많을까 하는 기대도 되었다. 마로니에와의 만남은 다소 신선한 충격이었다.
 

아류로 살아가기. 식물 이름에는 유난히 ‘개’자가 붙은 것이 많다. 개쑥부쟁이, 개망초, 개진달래, 개산딸기.... ‘개’자가 붙으면 아류, 짝퉁, 이미테이션이라는 느낌이 있다. 원조가 훌륭해야 이미테이션도 나온다. 그런데 식물에도 이렇게 이미테이션이라는 것이 통하는 것일까? 식물은 그냥 서로 다른채 존재하는 것 같은데, ‘너는 진달래, 너는 개진달래’라고 이름 붙이는 것이 누구의, 어떤 기준일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이것도 인간계의 이야기 일 뿐이다. 이름없는 잡초는 ‘아직 이름이 붙지 않은 풀’이라는 가능성이 있는데, ‘너는 개진달래’라고 확정지어버린 것이 꼬리표처럼 느껴져 왠지 안쓰럽다. 김춘수의 ‘꽃’이라는 시에서처럼 ‘그 모양과 빛깔에 맞는’ 이름을 붙여주었으면 좋을 것 같다.
 

자세히 보아야 예쁘다. 오래 보아야 사랑스럽다.
수류지를 향하는 길은 이곳이 수원이 맞나 할 정도로 시골의 느낌이 나고 정겹다. 차를 타고 지나가면서 보았던 벼를 가까이에서 보기도 하고, 해가 지는 논의 풍경은 편안함을 준다. 길가에 심겨있는 꽃들은 또 어찌나 소담하고 예쁜지. 예전에도 보았던 꽃들이 자세히 들여다보니 또 그 꽃 속에 온 세계가 들어있는 것처럼 정교하고 질서가 있다. 무엇인가를 이렇게 자세히 들여다 본적 있던가. 꽃 하나하나에 담긴 세계에 매료되었다. 그 색감과 조화로운 배치하며, 가장 예쁜 모습 그대로 존재하는 듯 했다.

각기 다른 꽃이지만, 각기 다른 매력을 갖춘 모습들. 짧은 시가 떠오른다.

‘자세히 보아야 예쁘다.
오래 보아야 사랑스럽다.
너도 그렇다.’
-나태주의 <풀꽃>
    
꽃이 이러하매, 사람은 또 어떨까? 있는 그대로가 아름답다는 생각이 절로 들었다.
 
 
길 위의 배움을 마치며
이번 여행길을 통해 참으로 많은 것을 보고, 생각하고 느낄 수 있는 시간이었다. 길 위에 펼쳐져 있는 이 모든 것이 배움으로 가득찬 ‘학교’라는 생각이 들었다. 광교산의 많은 풀과 나무, 꽃들, 그리고 동물들이 나에게 큰 선생님이 되었던 것 같다. 그들은 존재하며 온몸으로 보여 주는 것 같다. 다만 그것을 발견할 눈이 나에게 없었고, 이를 만나게 해줄 길잡이가 없었다는 것을 알게되었다. 숲에 대한 열정과 사람에 대한 애정으로 숲의 메시지를 친절히 알려주신 김현희 선생님은 이번 광교산 여행의 좋은 길잡이가 되어주신 것 같다. 길 위를 자유롭게 즐기는 것도 의미가 있지만, 느낌과 더불어 배움으로 끌어주는 ‘길위의 학교’가 있어서 더욱 의미있는 여행을 만들 수 있었던 것 같다. 수원 곳곳에 펼쳐져 있는 많은 학교들을 만날 수 있는 다음 여행이 기대된다.
 
글_최지영(공정여행가양성과정 1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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