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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재동화백의 만화로 돌아보는 나의 삶, 그리고 아버지를 말하다

작성자
홍승화
작성일
2013.10.14
조회수
5826/1



[9월 명사특강 후기] 박재동 화백의 만화로 돌아보는 나의 삶, 그리고 아버지를 말하다
 
‘박재동 화백’의 ‘만화로 돌아보는 나의 삶, 그리고 아버지를 말하다’ 특강이 9월 25일 수원시 평생학습관에서 있었다. 개인적으로 작년 "전유성’의 명사 특강을 시작으로 틈틈이 챙겨들었는데, 올해는 참석률이 저조했다.
 
올 1월 손미나의 ‘변화의 시작은 나로부터’강연을 대학 새내기가 될 큰 딸과 함께 들은 것이 마지막이니...강당에 들어가기에 앞서 신청자 명단 중 내 이름을 확인하는데, 헐레벌떡 내 또래가 뛰어온다.
자세히 보니 반가운 얼굴이다. 가까운 위치에 사무실을 두고 있는 남편도 오겠다고 연락이 온다.
좌 친구, 우 남편 사이에 자리를 잡고 앉는다.
 
선한 눈매와 은백색 머리카락이 멋스러운 박재동 화백이 강단에 오른다. 강의는 부산의 한 만화방을 배경으로 시작된다. “만화책 한 권 빌려 읽기도 어려웠던 시절. 아버지가 운영한 만화방은 보물섬이었다. 미세하게 갈려진 얼음가루 위에 어머니가 직접 만든 단팥을 한 덩어리 넣어 만든 팥빙수를 한 숟가락씩 떠먹으며 만화책을 읽는데 천국이 따로 없었다. 하지만 학교에서는 사정이 달랐다.
 
당시엔 불량식품처럼 만화책도 학생들이 기피해야 할 사회악이었다. 그런 사회적 분위기 속에서 만화방의 주인아들이었으니 학교에서의 생활은 지옥 같을 수밖에. 하루에 천국과 지옥을 오간 것이다. 가정환경 조사서의 아버지 직업란을 쓰는 것도 곤욕이었다. 다행히 중학교 2학년 담임선생님의 가정방문을 통해‘만화방’콤플렉스를 극복할 수 있었다.
 
” 영화 ‘시네마 천국’의 주인공처럼 화백도‘만화 천국’의 아이였던 것이다. 만화방에서의 유년시절이 화백의 삶으로 통하는 오솔길이 된 것일까? 반 고흐의 숙부들이 화랑 주인이었다는 이야기가 불현듯 떠오른다.
 
우리나라 만화 변천사를 소개한다.
 
‘그림자 없는 복수’는 만화 시대가 열리는 초창기 작품이다. 한국판 몬테크리스토 백작이야기인데, 그림보다는 글이 많아 낯설다. 언뜻 소설에 삽화가 들어간 모양이다. ‘만리종’에는 말풍선이 들어가기 시작해 독자들은 읽기가 수월해졌다. ‘부평초’부터 지문이 줄어들다가, ‘약동이와 영팔이’에서는 지문이 없어지고, 드디어 6컷 형식의 만화가 탄생한다.
 
‘녹의 여왕과 라이파이’는 한국판 슈퍼맨이다. 영화의 한 장면을 옮겨놓은 것처럼 스케일이 커져 웅장함까지 느껴진다. 지금도 태백산 어느 자락에 아지트가 남아 있는데 못 찾는 것이 안타깝다고 농담을 덧붙인다. 당시 ‘녹의 여왕과 라이파이’에 열광하는 아이들 이야기가 뉴스에 등장할 정도였다고 하니, 그 인기가 지금의 ‘뽀로로’ 수준이었나 보다.
 
 
만화 한 컷 한 컷을 설명하는 목소리와 표정에 각별한 애정이 느껴진다. 사랑과 열정을 감추지 않고 온전히 드러내는 화백의 모습이 천진난만한 아이 같다. 우리 모두가 아는 것처럼 만화는 오랫동안 인정받지 못했다.
 
40대 중반인 나도 만화책을 가까이하면 학업에 손실이 생길까 두려웠던 학창시절을 보냈다. 만화를 사랑한 화백은 ‘만화는 왜 교과서에 실리지 않는가?’주장하며 ‘만화 명예 찾기’에 나섰다. 그러다 국정교과서 중학교 1학년 생활국어에 처음으로 만화가 실리는 성과를 얻었다. 그것도 화백의 만화가......
 
최근 만화에 대한 시각이 달라지고 있다. 우리나라 만화 유통량이 세계 2위가 되었고, 만화진흥법이 국회에 통과되었다. 만화가 영화나 드라마로 제작되어 성공한 사례도 쉽게 찾아 볼 수 있다.
이런 변화를 통해 화백은 ‘천한 것 속에 귀한 것이 숨어 있다.’는 진리를 얻었다. “어떤 것도 천한 것이 없으니 진정으로 원한다면 그것에 열정을 쏟아라. 그 가치를 인정받을 때가 있다.”
 
화백의 삶에서 그의 아버지 이야기가 빠질 수 없다. 아버지는 학도병에 끌려갔다온 후 억울하게도 다시 군대에 가 5년의 복무를 마친다. 제대 후 교편을 잡지만, 건강의 문제로 접고, 만화방을 하게 된다. 굴곡 많은 삶을 포기하지 않고, 자신보다 나은 삶을 자식들이 살기 바라는 마음으로 일기를 쓰기 시작한다. 20년 동안 꼬박꼬박.......
 
“바다를 처음보고 파도를 그림으로 표현하고 싶었다. 마땅한 도구가 없어서 선택한 방법이 장판에 송곳으로 그리는 것이었다. 점묘법으로 열심히 그렸다. 외출에서 돌아오신 아버지가 장판을 보시더니 “잘 그렸네! 한 마디 하셨다. 얼마 후 장판을 새로 바꿨다.”
감정을 드러내지 않는 아버지의 조용한 성품이 고스란히 담긴 일화다. 화백이 고등학교 선발고사에 떨어져 재수를 했을 때, 고등학교 시절 전교 꼴찌를 했을 때, 심지어는 정학을 맞았을 때도 야단을 치지 않았다고 한다. 화백이 스스로 깨닫고 일어서기를 바랐으리라. 그런 아버지에게 또 다른 면이 있었는데, 불의를 보면 참지 못하고 그 부당함에 맞서 싸우는 기질이다. 화백은 그런 DNA의 영향으로 시사만화가가 되었으리라.
 
어린 시절 그린 포스터, 스케치, 만화, 풍경화 등을 소개한다. 습작까지도 수 십 년 보관하고 있었다. “그림을 꽤 잘 그렸지요?”하며 자신이 ‘자뻑’에 빠져있다고 웃었지만, 화백은 미술영재였다. 아들의 영재성을 익히 알고 있던 아버지는 스케치북, 사인을 만들어주며 뒷바라지를 한 것이다.
화백은 특히 재수시절 그렸던 114페이지짜리 만화, 정학을 맞고 부산 바다를 배경으로 그린 풍경화, 학창 시절 매일 밤 영화관에서 본 영화를 정리한 노트를 ‘진정한 공부의 결과’로 표현한다. 나는‘세상에 헛된 시간은 없는 것이다.’로 나름의 재해석을 해본다.
 
강의 마지막에 화백은 세 가지를 당부한다.
첫째, 천한 직업은 없다. 모든 직업을 따스한 시선으로 보라.
둘째, 일기를 써라. 그 시간이 창조의 시간이다.
셋째, 부모님께 자주 전화해라. 시작의 낯간지러움을 극복하면 된다.
 
오래된 사진첩의 사진 한 장 한 장을 들여다보며, 지나온 얘기를 나누듯 강의는 정감 있었다. 옆의 지인은 화백의 아버지가 남긴 일기장을 정리한 책까지 챙겨온 열성팬이다. 몸이 반쯤 앞으로 쏠린 채 앉아있는 것이 강의에 푹 빠져있음을 알 수 있었다.
 
 
강의 후 사인회가 이어지는데 어느새 나도 열성팬이 되어 수첩을 들고 서둘러 나간다. 화백은 따뜻한 인사말과 함께 붓펜(?)으로 나의 모습을 스케치한다. 이런 멋진 사인은 처음이다. 소중한 선물, 소중한 마음으로 간직해야겠다.
 
글_홍승화(시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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