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원시평생학습관 4월 담쟁이 문화살롱 [그림 읽어주는 남자] 강좌를 들었다. 그림과 관련한 강좌를 꼭 듣고 싶었는데 시간이 맞지 않아 내내 놓치다가 이번에 딱 맞는 시간에 강좌가 열리기에 일찍부터 등록하고 기다렸던 수업이었다.
기대를 가득하고 일찍 찾아가 가장 잘 보일만한 위치에 자리를 잡고 기다린다. 시간이 되고 사람들이 하나 둘 모인다. 어떤 분들은 근처에서 장을 보셨는지 **마트라고 씌여진 비닐봉지에 물건을 한아름 담아와 우리도 들어도 되느냐며 쑥스러운 듯 자리를 살핀다. 담당자는 “물론이지요.”시원스런 대답과 함께 그 둘을 자리로 안내한다. 미리 강의를 예약하지 않아도 앉을 자리만 있다면 현장에서 바로 참여할 수 있는 것이 담쟁이문화살롱의 매력인가보다.
카페 측면에 스크린이 설치되고, 강사처럼 보이는 사람이 들어와 담당자와 이야기를 나눈다.
노트북을 만지작 거리는가 싶더니 하얀 스크린 위에 까만 글씨가 크게 띄워져 있다.
[그림 한장의 인문학]
‘김종길. 미술평론가 경기문화재단 기획팀 뮤지엄운영파트장’
그림과 인문학은 평소 관심이 있던 분야이기는 한데... 저 끝에 ‘뮤지엄파트장’이 좀 걸린다.
뮤지엄이라... 박물관. 지루하고 딱딱한 이야기가 나올것도 같다. 뭐 어쩔 수 없지. 그래도 그림이야기를 듣고 싶어왔으니 한 번 들어보자.
“오늘 그림을 보는 가장 쉬운법을 알려드리겠습니다.”그림을 보는 쉬운법? 귀가 솔깃해 진다.
“그림은 내 앞에 펼쳐져 있는 즉 전경의 문을 열고 후경의 끝까지 들어가 작가의 정신을 보는것 입니다. 여기 두가지의 코드가 있습니다. 첫 번째는 1차적 시선을 통해 보이는 키워드를 보는 것이고, 두 번째는 후경의 끝으로 들어가 작가의 미적정신을 보는 것 입니다.” 음... 뭔말인지는 잘 모르겠지만 왠지 쉽게 다가온다. 문을 열고 들어가서 그림을 보라는 표현도 머리에 잘 그려진다. 이제 그림을 보여준다.
[임옥상, 보리밭I, 유채, 600×140, 1983]
먼저 1차적 시선을 통해 보이는 키워드를 먼저 살펴보기 시작했다. 초록빛 보리, 새파랗게 푸른 하늘, 구리빛 피부의 상의를 탈의한 상태의 시선이 불편한 나이든 남자 대충 그정도가 보이는 전부다. 그러면 이제 2단계로 들어갈 차례 그림읽기를 위한 ‘짧은 레시피’를 만들 차례란다.
그림의 재료, 크기, 제작년도, 발표연도 등을 캡션(명제)를 보고 먼저 파악한 후 자료를 찾아 작가의 정보와 그림이 그려지고 발표된 시대의 키워드도 찾아보면 그림을 읽는데 도움이 된다고 한다. 그리고 그림에 대한 강연자의 설명을 함께 읽어보았다.
보리는 겨울의 황소바람으로도 자란다. 한겨울 모든 자연의 뿌리가 침묵의 겨울잠을 청할 때 보리는 오히려 생의 뿌리를 활성화 시킨다.
(중략)
임옥상의 ‘보리밭I’은 보리-남자(아버지)-하늘의 삼단구조로 되어 있다. 저 보리들은 경칩을 넘기고 천둥소리를 들으며 봄 햇살에 키를 키웠을 것이다. 대지는 살랑거리는 따뜻한 아지랑이 봄바람에 보리 뿌리를 깊이 당기면서 밖으로는 보릿대를 쑥쑥 밀어서 키웠을 게 분명하다. 저 보리가 알알이 알갱이를 만들기 시작하는 시간은 그러나 피죽바람이 불어오는 시기이기도 했다.
(중략)
임옥상은 어머니 대지를 가꾸며 살았던 아버지의 황토 빛 건강한 육체를 보여주지만, 불안하고 심기불편한 눈빛을 통해서는 암울한 미래 농경사회를 예지한다.
1983년에 제작된 작품이니 딱 30년이 지난 저 눈빛의 현재는 지극한 현실이 된지 오래다. 대지의 신화 따위는 개발논리에 쳐박혔고 농경지는 어떠한 풍요도 약속하지 않는다. 천하의 근본이었던 농사를 하찮게 여기니 삶의 뿌리가 통째로 뒤흔들린다. 그러니 대보름이 되어도 여신은 깨어날 줄 모른다.
그림 한장으로 이렇게 많은 이야기가 풀어진다. 그림은 상징이라 했다. 그 상징을 읽어내는 것이 바로 그림을 읽는 것이라고, 그리고 그 그림을 읽는 것은 작가의 정신을 읽는 것이라고... 계속 설명이 이어진다.
다음 그림은 황토빛 편지 위에 낫이 놓여있다. 편지지가 아니라 편지다. 누군가 글을 써 둔 편지, 그리고 곳곳에 질경이와 민들레가 소박하게 그려져 있다. 전체적인 분위기가 따뜻하고 예쁘다. 그리고 이어진 또 다른 그림 산천, 대지(논)위에 커다란 낫이 놓여있다. 낫은 낡았지만 날쪽에 반짝 빛이 나는게 잘 벼려져 있는것이 분명하다. 낫 아래쪽으로 무언지 모를 들꽃이 얌전하게 그려져 있다.
[이종구, 아버지의 낫]이라는 작품.
두 그림이 연작으로 그려졌고 재질은 ‘장지’라고 한다. 장지? 한지를 두껍게 눌러붙여 만든 종이라고 한다. 예전에 기름을 먹여 장판으로 사용했던... 아! 그 누런 종이. 친구집 할머니방에서 본 기억이 난다. 그게 장지구나! 그런데 왜 그 장지에 그림을 그렸을까? 강연자의 설명이 이어진다.
그림의 재질도 중요한 키워드 중 하나라고, 작가는 우리의 대지와 아버지에 대해 그림을 그리면서 감히 ‘캔버스’따위를 쓰고 싶지 않았을 거라고... 작가의 정신이 살짝 엿보인다. 모내기를 막 끝낸 봄 논에 낡지만 잘 벼려져 있는 낫, 질경이와 민들레가 피워진 편지지 (대지)위에 낫을 그려넣어 농사와 노동에 대한 작가의 마음을 바로 아버지에 대한 마음을 그려넣은 것이라고... 낫이 바로 아버지 라고...
그리고 이어진 다음 그림.
선명하게 붉은 동백이 까만 동백숲을 배경으로 떨어지는 순간이다. 무언가 강렬한 느낌. 제주도 출신 작가 강요배의 ‘동백은 지다’라는 작품이다. 무언지 모지르만 숙연하고 고요한 느낌을 지울 수 없다. 하나하나 작가가 숨겨둔 키워드를 다시 살펴본다.
동백... 다른 꽃과 다르게 꽃잎이 날리지 않는 동백. 그 동백을 사용한 작가의 의도가 분명히 있을 거라고 찾아보라고 한다. 그림의 측면을 자세히 살펴보니 사람 그림자가 있다. 총을 들고 있는 것 같기도 하다. 가만 보니 몇사람 더 있다. 누군가는 쓰러져 있는 모양이고, 붉은 자욱... 이 보인다. 혹시 피? 동백이 피고지는 봄. 채 녹지 않은 눈이 있고 총을 든 사람이 있고 처연하게 목이 잘라져 뚝 떨어지는 동백이 있다.
4.3이다! 4.3 제주항쟁. 그렇구나! 그랬구나... 설명이 없이 보았다면 어둡고, 붉고... ‘뭐 내 취향이 아니네!.’하고 지나갔을 그림. 설명을 듣고 다시 마주보니 울컥 무언가 올라온다. 그래서 그림이 상징이라고 하는구나! 그래서 그림이 여타의 잘 쓰여진 문학작품처럼 사람에게 깨달음을 준다고 하는구나! 점점 강의 내용이 깊이 와 닿는다.
이어서 보여주는 그림은 최병수 작가의 ‘너의 몸이 꽃이 되어’라는 작품이다. 시커먼 연기, 터번을 두른 아랍계 남자, 그리고 그가 안고 있는 소년. 너무도 야위어 깃털 처럼 가벼워 보이는 소년의 팔과 다리는 사라지고 그 자리에 꽃이 흘러 무기로 뒤덮인 대지를 다시 덮고 있다.
전쟁이다. 전쟁중에 아들을 잃은 아버지의 느낌, 구도가 어디서 많이 본 듯 하다 했더니 아들을 안은 아버지 뒤로 아우라(후광)가 펼쳐져 있는게 곡 피에타 같다. 성모가 십자가에 매달린 예수를 내려 안고 있는 그림. 슬프지만 성스럽고 아련하지만 안타까운 느낌을 지울 수 없다. 길게 설명하고 이해시켜야만 느껴지는 전쟁의 참혹함과 무의미함을 그림한장에서 다 느낄 수 있는 소중한 경험이다.
강연자는 이야기 했다. 그래서 예술은 소중한 거라고!
우리가 평소 알지 못했던 수많은 역사적 사실과 삶의 통찰을 그들만의 상징체계로 재구성하여 다시 우리에게 보여줌으로써 우리의 정신세계를 풍요롭게 하고 나아가 깨달음을 주는 도구라고. 예술은 그런 거라고... 그리고 덧붙여 이야기 했다. 그림! 어렵게만 생각하지 말고, 나와 관계없는 것이다. 미뤄두지 말고 관심이 있는 그림에대한 정보를 찾아가며 하나하나 읽어보라고... 마지막으로 그런 과정 중에 고흐나 피카소처럼 해외의 유명작품들만 경외감으로 볼 것이아니라 우리나라의 민중예술을 하는 작가들의 작품과 그 속에 숨겨진 이야기로 역사와 현실을 읽어보라고!
그래. 그림은 사치가 아니었다.
대기업 사모님들이 재산축척을 위해 구입하여 금고에 넣어두는 금붙이가 아니라,
보고 느끼고 이야기하고 변화하라고 창조된 예술품이었다. 우리는 이제 또 새로운 세계에 눈을 뜬다.
글_수강생 차미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