학습관 [다정노트] 연재를 시작합니다. 코로나19로 학습관이 문을 닫은 동안에도 시민들의 배움은 오프라인에서 온라인으로 혹은 학습관 밖에서 소규모로 계속 이어졌습니다. 하지만 매우 답답하고 서로의 안부가 궁금한 날들이었어요. 그 마음을 담아 학습관 사람들의 소식을 매주 화요일과 목요일에 [다정노트]란 이름으로 전합니다. 팬데믹 기간 우리들의 배움과 일상의 분투를 만날 수 있습니다. #[다정노트]를 연재하는 시민기획단 나침반은 수원시글로벌평생학습관에서 책을 읽고 토론하며 저자를 만나고 강연을 기획합니다. 만남을 기록하고 그 기록을 또 다른 시민과 나눕니다. ======================================== <이야기, 역사의 기억을 찾다> 의 마지막은 『시베리아의 딸, 김 알렉산드라』의 김금숙 그래픽노블 작가와 함께 했다. 김금숙 작가는 ‘위안부’ 피해자, 제주 4·3 항쟁, 우리나라 원폭 피해자 등 굵직한 주제의 역사 만화를 그려왔다. 그 외에도 사회적인 이슈와 일상의 이야기를 담은 책을 꾸준히 내고 있다. 작가는 나침반 강연에서 우리의 아픈 역사이자 희미해진 사람의 이야기를 들려주었다. 조선인 최초의 사회주이자이자 여성 독립운동가, ‘쑤라’로 불린 김 알렉산드라다. 40명이 넘는 이들이 ‘시베리아의 딸’을 만나기 위해 온라인 줌으로 모였다. 홀로코스트 희생자 추모의 날인 1월 27일은 우리의 잊혀진 혁명가를 소환한 날이기도 했다. 작가는 김 알렉산드라의 짧은 설명으로 강연을 시작했다. 김 알렉산드라는 1885년에 극동 지역인 러시아 우수리스크에서 함경북도 출신인 김두수의 딸로 태어났다. 어머니는 그녀가 어렸을 때 돌아가셨고 큰 오빠도 전쟁 중에 죽었다. 아버지는 농사일을 하면서 틈틈이 익힌 중국어, 러시아어로 이주 한인들의 고충을 해결해 주었다. 알렉산드라는 10살 때 시베리아 횡단철도 건설 현장 통역관으로 징집된 아버지를 따라갔다. 그 곳에서 그녀는 노동자들의 처참한 현실을 뿌리깊게 알게 됐다. 우랄 지역의 벌목장에서 통역관으로 일하며 노동자들의 편에 섰다. 알렉산드라는 1917년에 러시아 공산당 입당, 한국인이 조직한 한인사회당의 핵심적 인물로 참여했다. 하바로프스크시 당 비서와 정부 외무부장으로도 임명됐다. 10월 혁명 후 백파에 붙잡혀 총살당했다. 김 알렉산드라는 두 눈을 가린 천을 풀어 자신의 죽음을 두 눈으로 보고 싶다고 했다. 김금숙 작가는 이 년 전쯤 ‘독립 운동가 100인 만화프로젝트’ 기획자에게 전화를 받았다. 해외에서 지낸 경험이 있는 작가에게 타국에서 태어난 김 알렉산드라를 맡아달라는 내용이었다. 작가는 다른 책 작업 중이라 거절하려고 했었다. 전화를 끊고 검색한 김 알렉산드라의 삶은 흥미진진했다. 엄혹한 시절에 자신의 가치를 행동으로 이어간 진취적인 여성이었다. 작가는 이주 노동자들을 이끌고 혁명의 길을 갔던 알렉산드라를 그리기로 결정했다. “ 영웅으로 묘사하기 보다는 역동적인 시기에 살았던 한 인간, 여성으로 바라보고 싶었어요. ” 알렉산드라의 자료가 거의 남아있지 않다고 작가는 말했다. 평전을 참고했지만, 사진이 별로 없어 캐릭터 잡는데 어려웠다. 동양적인 얼굴로 그리고 싶었던 작가는 우연히 한 사진을 발견했다. 주근깨 있는 하얀 얼굴이었다. 심장이 약하고 빈혈이 있던 그녀는 자주 쓰러졌다고 한다. 러시아의 뜨거운 햇빛으로 생긴 주근깨는 굴하지 않는 성격에 딱이었다. 강한 눈매와 다부진 입매의 알렉산드라가 그래픽 노블로 다시 태어났다. 작가는 백 년 전 러시아의 풍경을 그리기 위해 영화 <닥터 지바고>를 참고했다. 우랄 산맥까지 이어지는 눈 사막과 자작나무 숲 장면, 주인공이 입었던 의상은 작가에게 영감을 줬다. 작가는 100인의 독립운동가 만화 작업을 위해 상해로 답사간 이야기도 들려줬다. 알렉산드라와 동시대 독립인사들의 자취를 찾아다닌 값진 시간이었다. 약산 김원봉 선생, 인성학교 옛 모습, 임시정부 골목에서 해맑게 웃으며 놀고 있는 아이들과 밥 하고 있는 여성들의 사진을 보며 그때 그들이 지키고자 했던 일상을 떠올렸다. 윤봉길 의사가 폭탄을 던진 공원에서는 창작자의 시선으로 당시 상황을 상상했다고 했다. 작가는 눈물이 났다고 했다. 상해에 가면 난징대학살 기념관에 꼭 들러보라고 했다. 숙연해지는 분위기가 온라인으로 서로에게 전달됐다. 김금숙 작가는 다소 낯선 그래픽노블이라는 만화 장르에 대해서도 알려줬다. 사회의 어두운 면이나 자신의 이야기를 진정성있게 쓴 내용이 많다. 실험적인 성격의 형식을 지닌 작품이 많은 게 특징이다. 대사 없는 그림만 그리거나, 칸을 없애고 한 페이지에 그림하나만 배치하는 등 경계가 없는 점이 그래픽노블의 특징이다. 작가는 주로 사회적으로 소외된 존재를 그래픽노블로 담아냈다. 발달장애인의 이야기인 『준이 오빠』 도 읽어보고 싶은 책이다. 김금숙 작가의 『풀』은 여러나라에서 2019년 최고의 그래픽 노블로 선정됐다. 작년에 나온 『개』는 강화도에서 반려견을 키우면서 겪은 작가의 개인적 이야기다. 더이상 학대받는 동물들이 없기를 바란다고 간곡하게 말하는 작가의 발 밑에서 감자와 당근이 낑낑대고 있었다. 강연이 끝나고 다양한 질문들이 쏟아졌다. 그림에 대해 묻는 질문에 김금숙 작가는 대범한 스타일을 좋아해 붓그림을 자주 그린다고 했다. 힘든 작업을 견디게 하는 순간으로는 독자에게 감동의 피드백을 받았을 때라고 답했다. 그림 그리는 행복한 어떤 순간이 있어 매일의 일상을 견딜 수 있다고 했다. 사랑에도 열정적이었던 김 알렉산드라의 거침없음은 어디서 왔을까라는 질문에 외국에서 태어나 아버지의 곁에서 보고 자란 시간이 그녀를 만든 것 같다고 했다. 그럼에도 작가는 어린 시절 사랑을 받지 못한 이들도 스스로를 치유할 힘이 있다고 믿는다고 했다. 일제 강점기부터 분단과 유신 독재까지, 그림책, 동화, 서간문, 그래픽 노블로 만난 <이야기, 역사의 기억을 찾다>가 끝났다. 우리에게 네 편의 이야기가 전해졌다. 이야기를 품은 인간은 다른 이야기를 기다린다. 역사 저편에 가린 이들이 아직도 많다. 그들의 이야기가 우리를 기다리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