깁다
박영선
억만년 전부터 돌이었던 남자와, 윤 사월 초여름에
팔달산 아래 ‘성곽카페’에서 선을 보았지
해도 푸른 그 날은 돌에서도 땀이 돋았지
팔달산 돌계단을 오르는 첫 데이트에
진땀과 설렘에 젖은 열 폭 치마는
힘들다고 나무 끄트머리를 부여잡았지.
치마 한 쪽 가져간 삼백 년 묵은 나무는, 시치미 뚝 떼고,
나무에 앉아 있던 뻐꾸기 한 마리 뻐꾹뻐꾹
바람 한 자락 살랑 불어 붉어진 내 얼굴 식혀주었지
아직도 돌이었던 남자는
팔달산 수백 계단을 팔닥팔닥 굴러 내려가
실패하나 얻어다가, 찢긴 치마 깁고
새침한 내 마음도 깁고
마주 잡은 손마저 기워서
삼십 년 째 떨어지지 않고 있더라.
첫사랑의 기억을 이제는 바위 속에 감추어둔 남자와
푸른 해 붉어질 때 성곽에 올라보니
헌 돌 위에 새 돌이 기워진 성곽의 이끼는 아직도
첫 사랑의 열병을 앓고 있더라.
창밖에서 비추이는 한겨울 오후의 볕을 받으며
모딜리아니의 사랑, 고갱의 사랑, 마네의 사랑을
얘기하는 것도 좋았지만
우리 선생님들의
달콤 짭짜롬한 사랑얘기는
굳어가던 명치끝에 짜릿한 자극을 주었답니다.
예전에 썼던 시입니다.
즐겨이 들어주셔서 고맙고 부끄럽습니다.
다음 학기에 다시 만날 수 있기를 바랍니다~~^^